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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 설악에 오르는 일은 삶과 죽음을 엿보는 시간Move Mountain/Hiking 2022. 3. 23. 20:08
설악산 대청봉 일대 설악에 오르는 일은 삶과 죽음을 엿보는 시간이다. 가슴 시린 사고도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을 장소이자, 어떤 이에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장소다. 봉우리만 해도 700여 개, 그 봉우리와 계곡마다 이야기를 품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다.
설악은 늘 그랬다. 극과 극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단순히 사람의 경험과 감정을 떠나 두 얼굴의 모습을 한 설악산은 삶과 죽음, 개발과 보호, 고통과 쾌락이라는 상극되는 단어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런 개념이 상존하기에 설악은 더욱 아름답고 무서운 곳인지 모른다.
설악산 대청봉 정상 몇 년간 설악에서 일어난 나의 많은 이야기를 이름 모를 봉우리에 묻어놓고 설악을 올랐다. 지난 산행에서의 기쁨과 아픔, 두려움, 용기 같은 것 말이다.
백담사를 기점으로 오색에서 마무리를 지은 산행은 지난 2013년 2월 19일부터 20일까지였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버스는 눈으로 인해 통제되고 하는 수 없이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콘크리트 길은 유난히 길다. 이렇게 걷는 것은 참 더디고 지루하지만 이런 시간과 나의 모습이 참 좋다. 자신을 둘러보는 시간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오른다.
중청대피소 일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7km가 안 되는 거리를 쉬엄쉬엄 걸어 백담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잠시 숨을 돌리고 올라갈 채비를 한다. 사찰은 조용하다. 이곳을 넓히려는 공사소리가 거슬리지만 여름날 시끌벅적대는 관광객의 수다보다는 낫다.
대청봉에서 백 번째 담이 있는 곳에 절을 지으면 화재가 나지 않는다하여 지어진 백담사도 좋지만 난 이곳의 암자인 봉정암과 오세암을 좋아한다. 전설 없는 사찰이 어디 있을지는 몰라도 설악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암자가 유난히 좋다. 기가 막히는 전설과 이야기도 우선이고, 시간만 잘 맞추면 먹을 수 있는 공양은 설악의 숨겨둔 새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떠나 암자 곳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든다. 내가 산에 기대어 쉬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종교의 한 면에 기대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산을 다니는 이유는 어쩌면 종교와 같을지 모른다.
백담사의 정갈한 분위기를 뒤로 한 채 수렴동 계곡을 오르기 시작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 굳어 있던 계곡도 이제 조금씩 깨어나는 듯하다. 맑은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산들바람도 불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이렇게 천천히 쉬듯 오른 길이 600 고지가 넘어서는데 거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이정표의 남은 거리도 이제 믿을 수가 없다. 밑에선 봄기운 가득했지만 얼어있는 쌍용폭포를 보니 이곳은 한 겨울이고 눈도 제법이다. 봉정암 사리탑 앞에 서니 귀를 때리는 바람까지 불어온다. 아직도 설악은 겨울이다. 추석부터 눈이 내려 오뉴월에 녹아 설악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니 설악은 설악이다.
사리탑에서 설악산의 주요능선을 바라본다. ‘공룡능선, 용아장성, 울산바위도 보이고 속초 앞바다까지 보인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니 옆에서 기도하는 아저씨 한 분께서 "천화대랑 범봉도 보이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지난여름 갔던 천화대와 흑범길이 생각난다. 흑범길과 석주길에 얽힌 산 선배들의 이야기도 스쳐 지나간다.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으니 산이라는 것 대단하다. 봉정암을 지나며 기왓장을 나른 산악부 선배 이야기가 떠올라 미소도 짓는다.
이제 부지런히 발을 옮기는 것에 집중할 차례다. 봉정암에서 소청까지는 오르는 것이 만만치는 않기에 서두른다. 배낭의 무게도 제법이고, 나무키의 반이나 되는 곳까지 눈이 쌓였으니 호락호락하지 않다. 끝까지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오름 짓을 하는 것 밖에 없다.
내 몸을 통째로 날려 보낼 것 같은 바람에 몇 번을 휘청거리며 소청에 올랐다. 소청에서 중청으로 넘어가는 능선에서 바라본 외설악의 모습은 눈 시리고 청명했지만, 낭떠러지를 잠시 쳐다보고 있으면 집어삼킬 듯 한 입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추위는 나를 지옥으로 미는 듯했다.
그런 무서움을 뒤로하고 오늘의 쉴 곳인 중청대피소에 도착했다. 지키자고 만든 것이 오히려 헤치고 있는 것 같고, 산을 찾는 이가 많아졌어도 사랑하는 이가 많아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 대피소이다. 배정받은 침상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한 후 조용히 저녁을 차려 먹는다. 준비된 찬도 없지만 산이 주는 맛을 알기에 감사히 먹는다. 해가진 뒤 중청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스산한 기운이 가득하다. 이 사람 저 사람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아침 7시 바라클라바를 비롯해 온 몸을 뒤감고 대청봉의 일출을 보기 위해 나선다. 강한 바람과 추위에 숨도 거칠어지고 몸은 기운도 없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선 대청봉 정상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굵직한 능선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해가 뜨는 순간 설악은 절정이었다. 바로 천국이었다.
이번 설악에서 나는 지옥과 천국의 모습을 함께 보았다. 아마 마음 깊숙이 자리한 두려움과 무서움이 지옥의 모습일 것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당돌함이 천국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직은 미래에 대해 설레고 당차지만 한 편으론 두려움이 가득한 20대이기에 천국을 그리며 산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천국을 찾아 산에 오르며 자신을 다진다.
설악산 대청봉과 죽음의계곡, 건폭 아마 천국과 지옥의 경계는 한 끗 차이일지 모른다. 설악의 두 얼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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