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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 여린 달빛에도 자신을 비추는 산Move Mountain/Hiking 2022. 3. 25. 21:21
서울에서 4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영암은 이미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천황사 야영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가 되지 않았으나 이미 깊은 밤의 모습이다. 그 깊은 어둠 속으로 월출산의 거대한 바위는 숨었고, 여린 달빛에 자신의 테만 살짝 비칠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산을 살피니 큰 눈은 없다. 다만 계곡이 깊고 음지로 메워진 곳곳에서 잔설만이 보일 뿐. 영암 일대는 황량한 초겨울 산의 모습이었다.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
월출산 산행의 들머리로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천황사다. 시내와 가깝고, 천황봉을 빨리 오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5년만 해도 월출산을 다녀간 탐방객이 40만 명이 넘는데, 대부분 이곳을 선택해 올랐다. 여름철에는 계곡이 시원한 금릉 경포대 방향에 몰리기도 한다.
천황사를 시작으로 정상까지는 2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허나 빨리 오른다는 말은 오르막이 심하다는 말과 같다. 역시 천황사를 초입 삼아 오른 월출산도 만만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시작부터 마음을 재촉하는 계단이 이어지더니, 나중엔 바위에 설치된 난간을 따라 오르느라 줄 곧 땀을 뺏기 때문이다.
그렇게 40분쯤 지났을까. 월출산의 명물이라 부르는 구름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땅에서 120m 위로 솟았기 때문이란다.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가파른 철사다리를 올라 팔각정에 이르러 잠시 목을 축인다.
숨을 돌리고 구름다리를 몇 걸음 걸으니, 사방으로 펼쳐진 바위가 한눈에 조망된다. 솟구친 암릉에 눈을 팔다 정신을 차리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찔함이 밀려온다. 슬며시 다가온 공포감에 조심스레 구름다리의 끝 지점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구름다리는 원래 1977년 지역 산악회원들이 주도해 기금을 모아 1978년 시루봉과 매봉사이에 만든 다리였다. 이후 2006년 노후한 다리를 철거하고 길이 54m, 너비 1m, 최대 200명이 양방향을 통행할 수 있게 지은 것이다.
천황봉과 기이한 바위들의 향연
구름다리를 지날 때 오른편으로 솟아오른 바위가 마치 사람을 누를 기세를 하고 있다. 알고 보니 장군봉이다. 이 장군봉 옆으론 형제봉과 주변엔 특이한 이름이 붙은 바위가 많다. 하지만 장군봉 일대는 야생동물 군락지 보호를 위한 특별보호구로 지정돼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해발고도가 700m 넘을 쯤, 새벽이슬은 눈 조각이 되어 등산로 곳곳에 뿌려져 있다. 가끔 부는 바람은 나뭇가지에 붙은 상고대를 날리며, 조용하고 적막한 겨울 산의 모습을 알렸다.
무심히 디딘 발의 울림에 눈 조각은 떨어졌으며, 바람에 날린 눈가루들이 얼굴에 묻기도 했다. 덕분에 날릴 때마다 눈도 시큼시큼 감긴다. 눈이 많은 지역은 아니나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제법 쏟아지는 탓에 월출산은 겨울의 모습도 일품이다.
긴 오르막을 지나 통천문에 이르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에 닿았다. 정상에 오르니 막힘없이 내달리는 바위 능선과 영암 평야가 넓게 시야로 들어온다.
정상부는 넓게 평평한 바위를 드러내며 ‘해발 809m'의 표지석이 놓여있다. 사실 월출산 정상의 높이는 809m가 아니다. 정확한 근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의 높이로 알 수 있는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812.7m’라 표기됐기 때문이다.
시선은 이미 도갑사를 향해 있다. 멀찌감치 보이는 능선엔 계절 같이 않은 추위로 눈은 온대간대 없고, 누런 풀들만이 줄지어 바람에 흔들린다. 그 뒤로 보이는 돼지바위, 남근바위, 구정봉 등의 바위만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다.
월출산의 동과 서, 속은 다르지만 겉모습은 비슷해
도갑사로 이어지는 능선에서는 월출산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쪽인 천황봉 주변엔 크고 높은 형상의 바위가 굵직굵직하니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라면, 서쪽은 기교를 부리듯 작고 섬세한 바위의 형태로 줄지어 있다. 더불어 미왕재라는 여린 억새밭, 구정봉, 향로봉 등의 홀로 돋보이는 바위가 월출산의 멋을 더한다.
줄곧 가파른 계단을 오르던 길에서 이제 평평하고 순한 길로 얼굴을 바꾸었다. 산에서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걸으니 어느덧 구정봉 능선에 이르렀다.
사람을 누르는 기세의 바위들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보면 볼수록 정감이 흐르는 바위로 가득하다. 장군바위, 남근바위, 사랑바위, 돼지바위, 베틀굴 등 보이는 바위마다 붙여놓은 이름 덕이다. 이렇게 월출산 바위에 붙여진 이름만 270여개이다. 구정봉은 아홉 개의 웅덩이가 파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속에서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웅덩이를 살펴보면 큰 것은 지름이 3m쯤, 깊이가 0.5m에 이른다.
구정봉을 지나 큰 어려움 없는 능선을 1시간쯤 지나니 미왕재에 이르렀다. 억새밭이 넓게 펼쳐진 모습이 사뭇 놀랍다. 과거 숲이었으나 불로 인해 모두 타버리고 이후 억새가 자란 것이다. 단조로운 능선과 솟구친 바위의 기억이 머릿속에 흐릿하게 맴돌 때쯤 하산길로 접어든다.
산죽사이로 이어진 좁은 계곡을 따라 도갑사로 향하는 길. 얼마 지나지 않아 ‘철철철’ 계곡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 무덤덤하고 차가운 계절, 얼지 않고 흐르고 있는 도갑사 계곡이었다. 도갑사 계곡은 미왕재와 노적봉 사이로 난 작은 홍계골을 시작으로 끝내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이 산행의 여정도 도갑사 계곡 끝에 위치한 용수폭포에 이르며 마무리됐다.
이어 묵직함이 스며있는 사찰인 도갑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월출산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 석조여래좌상(보물 89호)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이렇듯 월출산에는 과거 99개의 사암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몇 곳의 흔적만 찾을 수 있다. 허나 강진군 월하리에 위치한 무위사를 비롯해, 월남사지, 구정봉 옆에 위치한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 등을 보아 상당한 사암이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월출산의 동쪽과 서쪽의 모습은 크게 다르다. 하지만 도갑사를 빠져나와 산 전체를 바라보니 천황사에서 바라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전날 밤, 여린 달빛에 비친 테와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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