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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 산의 색은 눈이 아닌 마음에서 볼 수 있더라Move Mountain/Hiking 2022. 3. 23. 20:48
치악산 구룡사 원주역에선 구룡사로 향하는 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있다. 편리한 교통 덕분에 구룡사는 치악산 산행의 들머리로 인기가 좋다. 또 비로봉 정상을 가지 않더라도 곧게 뻗은 전나무 숲에서 세렴폭포까지 이어진 아늑한 오솔길은 가파르지 않아 가족이나 연인 등 많은 사람이 오간다.
원주역에 도착해 41번 버스를 타고 20분쯤 달리니 ‘치악산 국립공원 5km’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잠시 뒤 ‘구룡사’ 푯말이 나오자 운전기사는 과감히 핸들을 꺾는다. 이때부터 느티나무들이 양 옆으로 늘어져 있는데, 산 밑이라 아직 색은 덜 여물었다.
시끌벅적하던 계곡의 번잡함은 사라지고, 그 옆으로 이어진 상가도 조용하다. 나이가 20~30살쯤으로 보이는 느티나무들은 구룡사 매표소 직전까지 이어진다. 산이 깊어질수록 잎의 색도 짙어졌다. 산 입구에 이르자 온갖 나무의 잎사귀는 형형색색 빛나고 있었고, 계절의 끝자락에 서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한 뒤 산행을 준비한다. 이곳을 시작으로 세렴폭포를 지나 계곡길을 통해 비로봉에 오를 계획이다.
이곳부터 길게 뻗은 소나무를 볼 수 있는데, 황장목이라 불리는 소나무다. 나무는 무심히 하늘을 향해 오른 모습이다. 곧게 자란 소나무는 쓰임이 다양해 많은 이들이 탐을 냈다. 조선시대엔 벌목을 금지하는 황장금표를 설치했는데, 치악산에 2곳이 있다. 60개의 황장목 봉산 중에서 구룡골은 유명한 곳이었다. 산사의 입구를 알리는 일주문을 지나 조용히 구룡사 앞에 닿았다.
계절의 끝자락에 선 구룡사
구룡사 앞마당에는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굵은 줄기에서 뻗은 가지는 하늘로 곧게 치솟았고, 나무의 표피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버텼음을 짐작케했다. 그 생김새가 오랜 전투를 치른 장수의 갑옷과 비슷하다. 밑동에 자란 이끼는 나무를 귀찮게 했으나, 그것도 세월의 흔적인지라 나무는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 앞으로 수령 200년이라는 푯말이 새겨 있지만 이를 비웃듯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사찰 내로 발을 옮긴다. 제법 휑하게 부는 바람이 텃새를 부리더니 이젠 대웅전 처마 밑의 종까지 울리며 주인행세를 부린다.
기와 넘어 보이는 은행나무의 색이 유독 짙다. 계절이 앞 다투어 싸우나, 그 사이 나무들은 방황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만의 색을 만든다. 자신들도 이 화려한 계절의 끝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자신만이 지닌 화려한 색으로 뒤덮고 1년을 마무리한다. 무심히 서 있는 은행나무도 자신의 나이보다 건재한 모습으로 자신의 색을 비추고 있다.
사찰을 빠져 나오니, 체험학습을 나온 중학생들이 치악산 구룡사와 상원사의 전설을 듣고 있다. “아홉마리 용이 심술을 부리며~”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궁금해 설화를 찾아봤다.
옛날 구룡사 자리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한다. 한 대사가 이곳에 들려 절터로 쓰면 좋겠다고 얘기하자. 용들이 내기를 걸었다. 재밌는 재주를 보여주겠다며, 용들은 하늘로 솟아 우박 같은 비를 쏟아 부었다. 순식간에 차오른 물은 산까지 잠기게 했다. 한참동안 비를 퍼붓은 용들은 이쯤이면 대사가 죽었을 줄 알고 내려왔다. 허나 대사는 태연하게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매워 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대사는 용들이 살던 연못에 부적을 던졌고, 곧 용광로처럼 물이 끓기 시작했다. 뜨거운 온도에 버티지 못한 용들은 도망을 가다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의 골에 치었으며, 도망가지 못한 한 마리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소에서 살다가 그 해 여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시계는 12시를 가리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산꾼에겐 익숙한 일이다.
각양각색 나무들의 조화
구룡사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탐방로는 낙석으로 폐쇄됐다. 구룡사 아래쪽으로 위치한 다리를 건너 우회해야한다. 약간 비탈진 경사를 지나 10분 정도 걸으니, 키 높은 전나무 숲을 만날 수 있었다. 전나무는 보통 40미터까지 자란다. 큰 키로 태양에서 가장 싱싱한 빛을 받아서 일까. 긴 세월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초록빛을 발산한다.
이곳을 지나 휘향한 색으로 물든 숲으로 들어섰다. 봄엔 노란 꽃봉오리로 유혹하던 생강나무는 가을에도 노란 잎을 내밀며 설레게 했다. 키가 작은 싸리나무는 채도가 낮은 노랑색으로 변해 이 계절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알렸다. 단단하고 잎사귀가 큼직한 쪽동백의 나뭇잎은 ‘또르르’ 말린 채 가지에 매달려 있다.
이 색을 내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을까. 당단풍은 자신을 알리는 고운 다홍빛깔을 끄집어냈다. 청명한 하늘 아래로 비춘 햇살이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마른 계곡사이로, 수명을 다한 잎사귀들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간다. 때론 바람에 날리기도, 동물의 잠자리가 되기도 한다. 가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밟히지만 어느 곳에서든 제 역할을 다한다. 쓸모없어 떨어진 것 같지만, 겨울을 나기 위해 버려야할 요소이며, 따뜻한 이불이 되어 추위를 막아준다.
계곡은 여름을 기억하고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마른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세렴폭포까지 닿는다. 폭포는 2단으로 구성됐으나, 수량이 적어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다. 뜨거운 여름 ‘콸콸’대며 치열히 움직인 계곡도 휴식에 접어든 것이다.
폭포 하단부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다. 폭포에서 내려온 물은 일렁이며, 제 갈 곳을 찾아 헤매고, 그 아래로 살가운 햇볕이 비춘다. 곧게 내린 빛은 물을 관통하며, 본연의 색을 만들게 했다.
폭포에서 내려와 나무다리를 지난다. 이어진 갈림길. 곧 바로 올라가면 사다리병창을 통해 비로봉 능선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어느 곳을 택하든 땀투성이가 되지만 덜 힘든 우측 계곡길을 택한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멀리 폭포 하나가 보이는데, 바로 칠석폭포이다. 적은 수량이지만 시원하게 물줄기가 내린다. 세렴폭의 아쉬움을 이곳에서 달래며,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이제 정상으로 가려면 가파른 너덜 길을 올라야 한다. 크고 작은 돌이 뒤엉켰지만, 제법 질서정연하다. 바위 간격에 맞춰 발걸음은 자연스레 익숙해진다. 1시간 30분정도로 이어진 길은 지루하지만, 가끔 뒤돌아 먼 산의 단풍을 바라보며 시름을 놓는다.
치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능선은 겨울을 준비하고
긴 계곡을 묵묵히 오르니 능선을 알리는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해가 비치는 곳은 따뜻하지만, 잠시 그늘을 만나면 몸이 ‘파르르’ 떨린다. 추위를 탓하며 정상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멀리 미륵불탑이 보이고, 치악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쪽은 아찔한 골산이었으나, 반대편은 상냥한 육산의 모습이다.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시기. 발 아래로 펼쳐진 전경을 바라본다. 마치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너울과 같다. 단풍 너울은 크기를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이산 저산을 옮겨 다니며 온갖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해질 무렵의 치악산 사실 나뭇잎 하나, 나무 하나 들여다보면 색은 그리 곱지 않다. 고와보였던 단풍도 자세히 마주하면 검은 점, 벌레가 먹은 자국, 말라 아픈 곳이 있기 마련. 하지만 그 작은 생명 하나, 풍경 하나 깊이는 이 넉넉한 산마루를 거닐면 알 수 있다.
산 정상 부근에선 이미 단풍은 떨어져 나가고 중턱에 머물고 있었다. 단풍이 아랫마을에 도착하면 이미 계절은 끝난 것. 서서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산에 기대어 쉬어본다. 정겨운 시간이 흐르는 사이, 노을이 다가오며 해는 땅에 닿을 준비를 한다. 어스름해진 풍경 사이로 하산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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